나는 내 인생의 일부를 살아간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난 내 인생의 100%를 살아가고 있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략 이렇다. 자기 주장이 굉장히 강하고, 자기만의 영역이 굳건해서 남이, 심지어 자기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바로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 못한다. 절대로. 그리고 가장 큰 특징, 그런 사람은 남들에게서 ‘자아(自我, Ego)’가 굉장히 강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러나…

난, 개인적으로 저런 사람들의 주장-자기 의지와 주관 하에 자기 인생의 100%를 살아간다는-에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vs.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관련된 의미를 잠깐 밝혔지만, 내가 내 인생의 100%를 살아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 다시 말해 나에게 집중된 그들 인생의 일부에 내 인생을 각각 온전히(‘완전히’가 아니다. ‘온전히’다. 차이를 모른다면 그냥 넘어가라. 설명하고 싶은 생각 없다.) 더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만, 난 내 인생의 100%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확실하게.

흔히들, 맨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최대한 공부했고 거기에 맞게끔 하려고 최대한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살 것이다.’라고.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살아왔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vs.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항로가, 아니다,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의사결정에서 조금이라도 바뀐 적은 없냐고, 이렇게 바꿔서 묻고자 한다. 정말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즉 한 번도 좁은 범위든 넓은 범위든 자신의 의사결정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바뀐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런 사람을 ‘신(神)’이라 부르고 싶다. 그렇게 냉철하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인 존재를 ‘신(神)’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누구를 ‘신(神)’이라 부른단 말인가?

우리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제일 먼저는 일반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그 이후에는 개인의 우선 순위에 따라 바뀐다. 이렇게 스스로가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스스로도 불확실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확인하면서 살고 있는데 왜 자신의 인생을 100% 살아간다고 주장한단 말인가?

스스로가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존재인데, 거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까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비중은 바로 위의 문단에서 보다 더 작아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난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에 현재는 내 인생의 일부만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앞서 나는 ‘존재의 시간 vs. 행동의 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vs.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에 대해 언급해왔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 인생의 일부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포함하는 비중을 늘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의견과 생각(사실 여기서 ‘깨달음’이라고 하고 싶으나 그렇게 쓰기에는 내 낯짝이 아직은 얇기 때문에 그렇게는 도저히 못 써서 그냥 이렇게 쓴다.)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다. 그러나 왈가왈부는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비롯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나갈 수있는 인생을,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내 개인적인 준비를 계속해서 해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 시간이 지나 내가 죽을 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의견과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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