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性善說)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보는 설. 중국 전국시대의 유자(儒者)인 맹자(孟子)가 역설한 성론이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본래 선에 대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하여 거기에서 우러나는 마음씨를 사단(四端;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의 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사단을 확대하면 인간의 선성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형태로 완전히 발휘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성선설은 인의예지라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덕목(德目)의 싹틈이 인간자연의 본성으로서 내재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한편으로 현실의 인간악의 유래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는 성(性)에서 선악은 가릴 수 없다는 고자(告子)와 논쟁을 되풀이하게 되었는데 그 쟁점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이후 약 50년 뒤에 순자(筍子)는 성선설을 부정하고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순자의 설은 예(禮)의 의의를 정립하기 위해 인심의 수성(獸性)을 강조한 것으로, 인간의 마음에 갖추어진 선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맹자와 순자의 설은 성설의 두 전형으로 대조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성악설 (性惡說)BC 3세기 무렵 중국 사상가 순자(筍子)의 설. 《순자》 23장 <성악편>은 <인간 본래의 성질은 악하며, 선하다고 하는 것은 위(僞;후천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전국(戰國)시대 말의 순자에게는 사회의 황폐, 예의(禮義)의 쇠퇴가 눈에 강하게 비쳐, 위와 같은 문장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계속되는 문장을 보면, 그가 말하는 성악설은 단지 맹자의 성선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행하기 쉬운 경향을 지적한 설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악설로는 성인군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을 터인데도, 이것은 정진·노력한 결과 악을 극복한 인간상이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성악 그 자체가 아니고, 그 성악도 노력에 따라서는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노력의 중요성이라는 점에 있다.
《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My Opinion]
난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고 본다. 나 역시 악(惡)하게 태어났다고 굳게 믿고 있고.
위의 성악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성악설이 인간이 악(惡)을 행하기 쉬운 경향을 지적한 설(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악설로 설명하기 힘든 성인군자의 존재를 악(惡)한 본성을 정진·노력을 통해 극복한 존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서 우선 성인군자의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세계 3대 성인으로 석가(불교), 예수(기독교-원래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다 포함한다.), 공자(유교-하지만 선(仙)의 개념인 도교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를 꼽는다. 그리고 여기서 범위를 좀 더 넓혀 세계 4대 성인을 꼽으라면, 위 세분에 이슬람교의 마호메트를 추가하는데, 난 우선 이 네분들을 신(神)적인 성인군자로 구분(내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의가 있는 사람은 이 다음 내용을 읽지 말기를 바란다. 난 논쟁(論爭)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제외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네분과 같은 신(神)적인 성인군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극히 인간적인 성인군자(지금은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난 판단한다.)로 범위를 국한시켜 말하려고 한다.
난 인간적인 성인군자들이 앞서의 설명처럼 악(惡)한 본성을 정진·노력을 통해 극복한 존재들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극복이라는 의미는 100% 선(善)한 본성으로 채웠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악(惡)한 본성을 정진·노력을 통해 50%를 넘어 100%에 가깝게 선(善)한 본성으로 채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극복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악(惡)한 본성의 대부분을 선(善)한 본성으로 바꾼, 하지만 절대로 100% 전부 다 선(善)한 본성으로 채울 수 없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해야 요즘처럼 혼돈스럽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이 설명되지 않을까? 비근한 예로는 석유에 대한 욕심으로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 및 그를 옹호하는 네오콘(Neo Con.)이 설명될 수 있고 아주 가까운 예로는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현실에 단순 투영하여 20명 넘게 살인을 저지른 유영철도 설명될 수 있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위 두 가지 예는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우리 모습을 적용시켰을 때, 정말 과감하게 ‘난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과연, 과연 있을까? 난 100% 없다고 본다. 만약 내 생각이 틀리다면, 세상은 좋은 일로 넘쳐나도 모자랄 판일진데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가?
혹자는 내게 말한다. 그렇게 판단해야 세상 사는 것이 편하다면, 그건 나만의 자기합리화다라고 말이다. 뭐 내 생각에 대해 굳이 그렇게 판단하고 싶다면, 나는 말리고 싶은 생각? 없다. 내 생활신조인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자!’도 지키기 힘든 마당에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에 대해 응대할 여유가 나에게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저변에는 과거의 내 행동(밝히기는 뭐하지만, 이왕 썼기 때문에 밝히자면, 난 과거에 비열하고 비겁했다.)에 대한 대가를 지금 받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고 여기에 이를 지적하고 보완해주신 분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감하기 때문이다. 즉, 인과법(因果法)에 의한 인과응보(因課應報)라고나 할까. 물론 그 분이 말씀하시길, 난 충분히 갚았다[應報]고 하시지만.
인과법(因果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내 생각을 밝히기로 하고 아무튼 이러한 내 생각이 지금 내 현실에 대한 회피성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굳이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본성이 악(惡)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 주변에 피해를 줬거나 혹은 알게 모르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게시판에서 이전에 내가 밝혀왔던 것들 모두 나의 악(惡)한 본성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 극복하기 위한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즉, 선(善)한 본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는게 그리 쉽지는 않다. 하루에도 12번 바뀌는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해서 그런가, 정말 쉽지 않다.
더구나 난 쉽게 바뀌는 불완전한 마음을 다스리는 존재가 바로 내 영혼(靈魂)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비록 우리 집안이 골수 천주교에 과거 4대박해 때 순교하신 무명성인(無名聖人)은 물론,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등을 배출했고 우리나라에 전파된 천주교의 역사(우리나라에 전파된지 220년, 개신교는 우리나라에 전파된지 100년이 조금 넘었고)와 같이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힘든 점을, 어쩌면 ‘성선설 (性善說) vs. 성악설 (性惡說)’을 통해 언급하면서 나 스스로 내 영혼의 능력을 배양하는 노력을 다잡고 또 확인하고 싶어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노력을 계속하려 한다.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어서까지 말이다.
저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대 선의 승리도 없고, 절대 악의 승리도 없다고 봅니다. 다만 살면서 한 쪽으로 치우칠뿐이며, 생을 마감할땐 처음과 같진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본인이 알지못하는 후생의 기억으로 남을 수 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보다 선을 행하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어찌보면 이 모든게 우리네들이 나누어 놓은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신 VS 악신을 나누듯이 말이지요.
‘절대’라는 개념은 존재한다고 봅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동전’이라고 칭하는 것처럼, ‘절대선’과 ‘절대악’도 같은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절대악’은 어휘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만으로도 무섭게 여겨지지만, ‘절대선’은 ‘선’이라는 어감을 통해 사람들에게 착각을 심어주어 실제는 ‘절대선’ 역시 무서운 개념이라는 인지를 하지 못하게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절대’라는 개념을 깨닫거나 만나거나 인지하거나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대’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네 인간사를 판단해야 한다고 보구요. 그렇다면, 끊임 없이 노력하는(물론 상대적이지요.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불문하구요.) 사람에게는 당연히 ‘끝’이 ‘시작’과는 다른 결과로 다가갈 것입니다. 또한 ‘선신’과 ‘악신’ 역시 판단 기준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같은 연장선 상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네들이 나누어 놓은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고 들려왔던, ‘보다 선을 행하라’라는 어구가 의미하듯이 억지로 나눈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진 결과라고 판단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선신’, ‘악신’ 모두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