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조금 길지만 괜찮은 글이다.

지금도 국내 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웅(桓雄)’ 보다 ‘한웅(桓雄)’이, ‘환인(桓因)’ 보다는 ‘한인(桓因)’이 더 맞다고 생각하기에 그 부분들만 수정해서 올린다.

참고로 저자의 약력은 글 맨 아래에 있다.

※ 원문: 한민족의 뿌리 사상=송호수(宋鎬洙)


한민족의 뿌리 사상

-송호수(宋鎬洙)-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吾鄕淸彦)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衛滿)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한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한인천제(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천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씨는 “한동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大汶口文明圈)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少昊氏)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년 전 것”이라고 합니다. 5785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참고로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太호伏犧氏), 여와씨(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수도는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 전 2천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상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사상의 원형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한웅천황 시대가 1565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천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한인이 한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한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한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한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년이라고 쓰며 유대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 이 삼화개천경(三化思想開天經)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三一神誥)’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만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대 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司徒:문교장관) 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족이입니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에 보면 “저풍(諸馮)에서 태어나 부하(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순임금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고 밝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민(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從昔己來)”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 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宴坐石)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玉龍集)’ 과 ‘자장전(慈藏傳)’에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년 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文化東源論考)’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Kraemer, 1897~)와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八卦符號)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소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在無上一位)하사 유대덕대혜대력(有大德大慧大力)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즉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년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 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습니다.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년이니까 즉 21960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 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폄石亦從東方來)”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지 않습니까?.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Gheorghiu 1916~) 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라고 지난 1986년 4월 18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인간 사상은 미래 21 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다” 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 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천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事大主義史觀)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죠.

송호수(宋鎬洙) 약력:
미국 S.Baylor 대학 박사과정졸업, 철학박사
동아대, 부산대, 고려대, 한성대 전임 및 강사
미국 S.Baylor 대학 명예교수 및 연구교수
저서 : ‘종교단체의 재무행정에 관한 비교연구’ ,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 ‘한민족의 뿌리사상’ , ‘겨레얼 삼대원전(三大原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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